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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의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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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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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이 지나온 길
고령이 지나온 길

다음 표는 시대, 년도, 내용으로 구성된 고령이 지나온 길 안내 입니다.

시대 년도 내용
선사시대 구석기 다산면 곽촌리 낙동강변의 구석기시대 유적
청동기 고인돌 무덤과 선돌 세움ㆍ바위그림 새김
대가야 42년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가야산신과 이비가(夷毗訶)라는 천신 사이에 태어난 뇌질주일(惱窒朱日)이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되었다는 건국신화가 전해옴
400년 가야ㆍ백제ㆍ왜가 서로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함
479년 하지왕(荷知王)이 중국 남제에 사신을 보내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아옴
481년 고구려와 말갈군이 신라를 공격하자 대가야와 백제가 신라를 구해줌
522년 이뇌왕(異腦王)이 신라 왕족 여자와 결혼함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멸망함
551년 우륵과 그 제자들이 신라의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함
554년 백제와 힘을 합쳐 관산성에서 신라와 싸웠으나 패배함
562년 제16대 도설지왕(道設智王)때 신라 진흥왕의 공격으로 멸망함
통일신라 757년 고령군으로 이름이 바뀜
고려 940년 경산부(京山府)에 속함
1175년 감무(監務)가 내려와 다스리기 시작함
1390년 박위(朴葳)장군이 왜구를 격파함
조선 1413년 고령현에 현감이 내려와 다스리기 시작함
1593년 임진왜란 의병대장 김면(金沔) 장군의 의병활동
1597년 정유재란 고령대첩
근ㆍ현대 1895년 경상도 고령군으로 됨
1896년 경상북도 고령군으로 됨
1979년 고령면이 고령읍으로 승격되어 1읍 7면이 됨
2015년 고령읍이 대가야읍으로 명칭 변경
고령의 발자취
신라ㆍ통일신라시대
대가야의 도읍이었던 고령은 562년 신라에 병합되면서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대가야가 만들었던 곳곳의 견고한 산성들은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견제하며 삼국을 통일하는데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청주(菁州: 康州로 바뀜)에 속하여 적화현(赤火縣: 冶爐縣으로 바뀜)과 가시혜현(加尸兮縣: 新復縣으로 바뀜)을 거느렸고, 757년에는 다시 고령군(高靈郡)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신라와 후백제의 국경이 맞닿아 있어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려시대
고령은 고려 초인 940년에는 경산부(京山府)에 속하게 되었고, 그때까지 거느리던 야로현과 신복현이 떨어져나가 그 세력이 약해졌다. 이어 고려 무인정권 시기인 1175년에는 감무(監務)라는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가 오면서 다시 지위가 높아졌다. 한편, 고령은 낙동강을 통해 바다와 이어져 왜구가 드나들었는데, 고려 말에는 박위 장군이 고령에서 왜구를 격멸하기도 했다.
조선 및 근대
조선이 건국된 이후 1413년에 고령에는 현이 설치되어 중앙에서 현감이 내려와 다스리게 되었다. 그즈음 고령에 살고 있던 토박이 성씨인 박(朴)ㆍ신(申)ㆍ유(兪)씨들이 이름난 가문으로 성장하여 서울로 가서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에 살고 있던 김면(金沔)은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이 되어 활약하다가 전장에서 순국하였다. 또 정유재란 때에도 고령의 의병장 박정완(朴廷琬)이 고령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895년에는 고령군이 대구부(大邱府)에 속했으나, 이듬해 다시 경상북도 고령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