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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의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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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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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于勒)

우륵은 대가야국 말기 성열현 출신으로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을 창제하고 많은 악곡을 자곡하여 연주한 음악가로서 그의 공적을 인정받아 ‘악성’이라 추앙받게 되었다.

우륵은 고령읍 쾌빈리 정정골에서 거주하였는데, 마을의 유래가 가야금의 정정한 맑은 소리에서 비롯되었으며 일명 ‘금곡(琴谷)’이라고도 한다. 가실왕은 우륵에게 중국의 쟁을 모방하여 132현금인 가야금을 창작케 하고 곡을 지어 연주토록 했다. 가야금을 제작하는데 쓰인 목재는 오동나무이고 12현은 명주실로 만들었는데, 음은 오른손으로 뜯고 왼손으로 안족(雁足) 바깥쪽을 동요시켜 소리의 고저를 조정하였다.

가야금의 형태를 보면 상부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요, 하부가 평평한 것은 땅을 본 뜬 것이며, 현주가 12개인 것은 1년이 12개월임을 상징한 것이다.

그리고 상부와 하부 가운데 비어 있는 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말하는 것이고, 쟁의 길이가 6척인 것은 율수를 모방한 것이라 한다. 또한 가실왕은 우륵에게 작곡을 계속할 것을 명하였고 특히 12곡을 만들었는데, 이는 가야 연맹의 여러 지방을 토대로 하여 작곡을 하였으며 그 지방의 자연과 풍속과 민심을 살핀 것이라 한다. 우륵은 평생 동안 185곡을 작곡하였다고 하는데 현재까지 전하는 것은 한 곡도 없고 다만 12곡의 곡명만 전하고 있으며 이는 12지방의 이름을 나타낸다고 한다.

우륵은 대가야국이 점차 쇠퇴의 빛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 원인이 정치, 군사적 원인보다는 가야금의 유흥이 국운을 자초하였다고 보고 대가야국 멸망 11년 전에 신라에 망명하였다고 전해지나, 우륵의 망명에 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어 단정할 수는 없다.

신라는 우륵을 국원(지금의 충주)에 인치하고 가무를 신라인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진흥왕은 왕 12년 3월, 국내를 순시하다가 낭성에 도착하여 우륵과 그 제자 이문의 소문을 듣고 그들을 불렀다. 왕은 하림궁에서 그들이 새로 작곡한 가야금 연주를 듣고 크게 감탄하여 기뻐하였다. 우륵은 진흥왕의 총애를 받아 가야금의 보존과 보급에 힘을 쏟았다. 진흥왕은 주지와 계고 만덕에게 우륵으로부터 음악을 배우도록 하였다. 우륵은 그들에게 재능에 따라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주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그 후 가야금은 진흥왕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 되었고 궁중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야금을 연주케 하였다. 한 신하가 가야금을 망국의 음률이라 하여 배격하자 진흥왕은 이를 꾸짖고 나라의 기강이나 흥망은 음악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하여 그 보호에 힘을 기울였다. 진흥왕은 그의 재주에 감탄하여 가야금을 신라의 대악서에 편입하여 신라 3현의 하나로 자리를 굳혀 주기도 하는 등, 진흥왕은 대가야국을 멸망케 하였으나 반대로 우륵과 가야금은 보호를 받아 우리의 국악으로 정착을 하게 되었다.

우륵은 말년에 충주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며 살았다. 지금 충주시의 청금정(聽琴亭) 자리에는 대가야 사람들이 많이 모여 우륵의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고 전하고 있다. 우륵이 작곡한 12곡의 곡명을 살펴보면, 허가가도, 상가라도, 보기, 달기, 사물, 물혜,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가야금을 제작케 한 음악의 군주인 가실왕(嘉悉王)이 대가야의 역대 군왕 중 몇 대이며, 어느 시대에 해당하는 지는 확인할 수 없다. 가야금은 신라에 들어가 ‘신라금’이 되었으며, 그 후 일본까지 건너가 일본의 주주악기(主奏樂器)가 되었으며, 일본 나라 정창원 보물고에 그때의 가야금이 1,300여 년 전 모습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승휴

이승휴(李承休/1224~1300)고려시대의 문신. 자 휴휴(休休). 호 동안거사(動安居士). 가리이씨(加利李氏)의 시조. 1252년(고종 39) 문과에 급제한 다음 해에 홀어머니를 뵈러 삼척현에 갔다가 몽골의 침략으로 길이 막히자 구동(龜洞)에서 어머니를 모시면서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였다. 63년(원종 4)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 등에게 구관시(求官詩)를 보냈으며, 이들의 천거를 받아 경흥부서기(慶興府書記)가 되었다. 70년 도병마녹사로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을 때 횡렴(橫斂)과 영선(營繕)으로 백성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에 대해 극론하였고, 이후에도 신진관료로서 개혁적 삶을 살았다. 73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가서 문장을 떨치고 그 공로로 잡직서령 겸 도병마녹사(雜職署令兼都兵馬錄事)가 되었다. 다음 해에 또다시 원종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원나라에 가서 태자의 상복(喪服)을 고려식으로 할 것을 요청하여 허락받았고, 이 과정에서 몽골과 다른 우리 문화의 독자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충렬왕 때 감찰어사·우정언이 되어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15개로 상소하였고, 우사간으로 양광충청도안렴사(楊廣忠淸道按廉使)가 되어 장리(贓吏)를 탄핵했다가 원한을 사서 동주부사(東州副使)로 좌천되자, 이때 자신을 동안거사라고 불렀다. 뒤에 전중시사(殿中侍史)에 임명되어 80년(충렬왕 6)에 국왕의 실정과 국왕측근의 폐단을 10개항으로 간언하다가 파직되었다. 이에 구동으로 돌아가 용안당(容安堂)에 은거하면서 민족문화와 민족사의 독자성에 대한 자부심을 기록한 《제왕운기》와 불교적 내용의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하였다. 98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충렬왕 때의 폐정을 개혁하면서 사림시독학사 좌간의대부 사관수찬관 지제고(詞林侍讀學士左諫議大夫史館修撰官知制誥)에 제수하자 민간의 이해와 시정의 잘잘못을 모두 말했다. 이어 자정원동첨사 비서시판사 숭문관학사(資政院同僉事秘書寺判事崇文館學士)가 되었다. 그러나 곧 사직을 요청하여 밀직부사 감찰대부 사림학사승지(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에 임명되어 치사(致仕)하였다. 저서에 《제왕운기》가 있고, 문집으로 《동안거사문집》이 있다.

신숙

고려 왕조가 문치주의에 입각하여 귀족정치에 이른 시기는 의종 때라 할 수 있다. 의종은 태평호문의 군주로서 전국 각지에서 모아 온 기화, 괴석을 벌여 놓고 못을 파고 선산을 만들었다. 궁성에 발을 붙일 겨를이 없이 돌아다니며 향락을 생활에 도취되었고, 따라 다니는 문신,환관도 환락에 젖고 득세를 거듭 할 때 무신 정중부가 난을 일으켜 왕을 폐하고 문신을 학살한 때도 바로 이 때이다. 이때 고령 출신인 신숙은 명경과에 올라 청렴 충직한 사람으로 명망이 높아 옳지못한 일이 있으면 그것을 보고 지나치지 않았고 특히 내시들의 전횡을 규 탄하였다. 내시 윤언문이 수창궁 북쪽 뜰에 기이한 돌로 가산을 만들고 정자 를 지어 '만수(萬壽)'라 이름짓는 등 호화롭게 조경을 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어느 날 임금이 이 정자에서 연회를 베풀고서 파하려 하는데 갑 자기 가산이 무너지고 암탉이 울었다. 이에 대신들은 윤언문, 한취, 이대유 등 을 벌하도록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않자, 순숙이, 임경 등과 한께 상소하여 간 함에 왕도 어쩔 수 없이 윤언문 등 4명을 벌하였다. 신숙이 지문하성사로 있을 때 의종에게 환관인 정함이 함부로 월권하여 방 자하게 행동함으로써 간의 대신인 김석과 함께 정함의 부당함을 상소하였으 나 왕이 듣지않자 신숙은 다시 조정이 창업이래 환관을 조정 신하로 제수한 일은 일찍 없었던 일이라 주장하였다. 그후 환관 정함은 수사공으로 강등되었 으므로 신숙도 다음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고령으로 내려와 시를 지어 유유 자적한 심정을 달래기도 하였다.

김수옹

기재(棄齎) 김수옹은 1513년 월기(고령읍 지산리)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글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며 조식은 그를 보고 장차 큰 인물이 될 것 이라고 칭찬햇다. 그는 성장하여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36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가 예안 현감으로 재직하는 동안 인자 겸손하고 공평 정직한 정무 수행으로 관인과 백성이 그를 존경하며 추종하였다. 그 후 경상도사, 평 안평사와 이조랑을 거치면서 관아의 신망을 한 몸에 받았다. 명종 즉위 후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윤원형, 이기 등 소윤이 형조판서 윤임 과 이조판서 유인숙 등 대윤을 죽이고 많은 명사를 내쫓을 때 김수옹은 을사 사화를 부당하게 생각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시를 지어 심경을 달래었 다. 김수옹은 김굉필과 정여창을 추모하여 지암동 밑에 삼수정이라는 학당을 짓고 경적을 가르침에 부근에서 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또한 동생 인 내옹도 문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으나 형의 학풍에 도취되었다고 한다. 그는 '남전여씨향약지의' 10여조를 정하여 향약을 설립하고 상호부조와 권 선징악의 학풍을 진작하였고 또, 부가 와병중일 때 단지 헌혈하는 등 소학에 서 가르치는데 정성을 다해 부모를 봉양하였다. 그가 예안 현감으로 있을 때 스승인 퇴계로부터 감씨를 얻어와 고향인 모사 골(지산리)에 이를 심어 유명한 고령 수시를 보급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퇴계의 학향이 온 마을에 풍겨 퍼진다 하여 지산리를 향림(香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1559년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 후 지방민들이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향림정을 건립하였고 영연서원에 제향되었다.